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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램터에서

Essay

by 고대92 2022. 10. 19. 0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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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체국에 가면 잃어버린 사랑을 찾을 수 있을까~”

이수익 님의 시 “우울한 샹송” 의 한 구절이고 내가 좋아하는 길은정님의 노래 가사이기도 하다. 난 어릴 때부터 가수 길은정님의 노래를 좋아했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어느 순간부터 이 구절을 흥얼거릴 때면 난 가끔 이렇게 바꾸어 부르곤 한다.

“바램터에 가면 잃어버린 추억을 찾을 수 있을까~”

 

“바램터”.....

세종캠퍼스(당시 서창캠퍼스)를 함께 다녔던 친구들 중에는 익숙하고 그리운 이름일 수 있겠다. 바램터는 인문관 앞 잔디밭(광장) 한편에 있던 등나무 벤치를 부르던 이름이다.

 

 1992년 입학당시 세종캠퍼스는 안암캠퍼스에 비해 열악한 환경이었다. 

가끔 인터넷에서 보는 지금의 세종캠퍼스와는 비교 할 수 없을 정도로 건물이며 공간이며 많은 것이 부족하고 때로는 황량하게 느껴지기도 했던 그런 환경 이었다.

 

 안암캠퍼스 학생회관 앞 민주광장처럼 학우들이 많이 모이거나 집회나 행사를 할 만한 장소 또한 딱히 없었다. 

인문관 앞 잔디밭(광장)은 당시 총학생회를 비롯한 학생회의 출범식이나 집회, 대동제 개,폐회식등의 행사가 주로 열리던 공간 이었다. 아울러, 학우들이 가장 많이 오가는 길목이기도 했고 여학우가 많지 않던 캠퍼스에서 가장 많은 여학우들을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했었다. 이런 까닭에 아마도 일부러 이곳을 지나던 타 단과대 남학우들도 많았던 것으로 기억되는 그런 곳 이었다.

 

 그곳에 “바램터”가 있었다.

 

 내 기억 속 바램터는 봄이면 파스텔 톤 연두 빛을 한껏 머금은 등나무 잎들과 연보랏빛 등나무 꽃들이 잔디밭(광장)을 가로지르는 청량한 바람과 만날 때면, 눈꽃처럼 꽃잎이 흩날리고 바람 향 가득 품은 꽃향기가 코끝을 간질 던 곳이다. 거기에 스피커를 타고 흐르는 음악까지....

 

 경상대 학생이던 내가 이곳 바램터를 자주 찾은 건 여학우 들이 많은 인문관 앞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나는 92년 봄 당시 교내 방송국(KDBS) 수습국원 이었는데 수습국원의 임무 중 정규방송 모니터 역할이 있었다. 이 곳 바램터는 모니터 장소였다. 바램터 등나무 사이사이엔 방송국 스피커가 달려 있었다. 아침,점심 그리고 저녁 하루 세 번씩 방송을 했는데 주로 점심땐 음악 방송이었다. 음악방송 프로그램명 자체가 “바램터에서” 였다.

방송 출력은 괜찮은지 고장 난 스피커는 없는지 방송을 청취하는 학우들의 반응은 어떤지를 살피는 일이었다. 

점심 방송 모니터를 할 때면 때가 때인지라 배가 많이 고플 때가 많았는데, 그럴때면 바램터 옆 소위 “깡통”이라 불리던 매점에서 김밥이며 쏘세지 등 군것질 거리를 사서 먹곤 했었다. 

 

 매점에선 아르바이트 학생들이 판매를 했었는데, 아마도 근로 장학생들이 그곳에서 일을 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당시 아르바이트 학생 중 눈에 띠는 여학우가 있었다. 나와 방송국 남자 동기들은 그 학우를 어느 순간부터 “쏘세지 아가씨” 라고 불렀다. 저녁 편집회의를 위해 방송국에 모일 때면 오늘 쏘세지 아가씨를 봤느니 못 봤느니 말을 한번 걸어 봤느니 어쩌니 하면서 떠들던 우리의 주요 관심사 중 하나였다. 그 여학우가 OO과 92학번 이고 OO과 내 연극반의 일원 이었다는 것이 지금도 어렴풋이 기억이 난다. 안타깝지만 그 여학우의 이름과 얼굴을 지금은 잊어 버렸다. 30년이 지난 지금 그 “쏘세지 아가씨”는 어떻게 살고 있을까? 여전히 아름다울까?  

 

 현대음악의 이해를 강의 하시던 지금은 돌아가신 곽 연 선생님께서 방송국을 찾아 오신일이 있었다. 강의를 위해 출강하시던 길에 “바램터”에서 울리는 클래식 방송을 듣고 찾아 오셨다.

클래식 방송은 일주일에 한번 편성되어 있었는데 당시에 학우들의 관심밖에 있던 방송 이었지만 곽 연 선생님은 클래식 방송이 좋다고 하시며 칭찬과 격려를 해 주셨다. 이 인연으로 훗날 곽 연 선생님께서는 방송국 방송잔치(제)에도 출연 해 주셨다. 

바램터를 떠올리면 가끔 곽 연 선생님과 선생님의 강의가 그리워지곤 하는 이유다.

몇해 전 우연히 선생님께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너무나 맘이 무거웠었다. 아마도 선생님께서는 천국에 계신 지금도 너른 강당 피아노 앞에 앉아 열정적으로 강의를 하고 계실 것만 같다. “나~가자 폭풍같이 고대 건아여~”라고 노래 부르시면서....

 

 인문관에서 강의를 하시는 교수님들은 “바램터”에서 울리는 방송 소리를 좋아하지 않으셨다. 강의에 방해가 된다고 종종 항의를 받기도 했었다. 인문관 주위에 학우들이 가장 많고 당시 방송국의 주력 스피커가 바램터에 있었기에 이런 항의들이 있을 때면 스피커 방향을 돌려놓거나 송출 출력을 한동안 낮추었었다. 그러다가 며칠 후 몰래 다시 스피커를 돌려놓고 출력을 높이곤 했었다.

이 모든 걸 바램터는 다 지켜보았지만 말없이 늘 내편이 되어 주는 것 같아 든든한 친구처럼 느껴지곤 했었다. 바램터는 나에게 있어 비밀을 지켜주는 의리 있는 친구로 추억되는 곳이기도 하다.

 

 늦가을 금요일 오후 썰물처럼 학우들이 캠퍼스를 빠져나가면 “바램터”는 적막함으로 가득했다.

푸르던 나뭇잎들이 다 떨어진 마른 등나무 가지들 사이로, 을씨년스런 늦가을 바람이 지날때면 바램터는 더욱 쓸쓸했다. 그렇게 겨울이 오고 눈이 쌓이고 녹고.....

새봄이 되어 캠퍼스로 다시 돌아올 때면 난 바램터를 먼저 찾곤 했다.  

바램터는 그때마다 변함없이 그 자리에서 날 맞아 주었다. 

시간이 켜켜이 쌓여 30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 바램터는 아직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을까? 그때처럼 누군가의 바램터로 여전히 불리고 있을까? 꼭 그렇기를 나는 지금 바래본다. 

 

 “바램터”에서 나는 많은 사람들과 만나고 헤어졌다. 그저 스쳐 지나기도 했고 군대 가는 친구를 배웅하기고 했으며 선배,동기,후배들과 때로는 술잔을 기울이기도 했다.

그 시절 나는 바램터에서 무엇을 바랬던가? 피끓는 청춘의 뜨거운 맘으로 민주,민중,통일,노동해방,언론해방......같은 사회변혁을, 때로는 소소하게 짝사랑하는 그녀와 잘 되기를 바래기도 했을 터이다.

그곳에서 만나고 헤어졌던 많은 사람들은 어떤 바램들이 있었을까? 그 바램들을 30년이 지난 지금 다들 이루었을까?

 

나는 다시금 흥얼거려 본다.

 

“바램터”에 가면 

잃어버린 추억을, 

잃어버린 청춘을 찾을 수 있을까~”


경상대 행정학과 이석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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