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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지(奧地) 아니 NZ에서의 첫사랑

Essay

by 고대92 2022. 10. 18.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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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Holgi, 출처 Pixabay

여행 마니아라면 누구나 동경하고 가보고 싶어 하는 나라.

태평양 건너 지구 반대편 남반구에 있는 천혜의 자연과 낯선 문화 속에서 한여름의 크리스마스를 상상하게 되는 나라, 뉴질랜드

젊은 시절 나의 첫사랑은 그곳 뉴질랜드에서 아름답게 꽃 피웠던 것으로 기억된다.

 

본격적인 첫사랑 이야기에 앞서 조금의 배경설명으로 누구나 이야기의 시작이 그러하듯 우리가 입학했던 1992년을 잠시 회상해볼 필요가 있다. 

합격통지서를 받은 지 얼마 지나지 않은 1992년 1월, 입학식도 하기 전에 신검통지서가 집으로 날아왔다. 본적지가 전남 광주인지라 그 겨울에 광주지방병무청으로 신체검사를 받으러 내려갔다. 체력과 체격만큼은 누구에게도 떨어지지 않던 그 시절, 친구들한테 항상 “너는 최소 헌병대고 웬만하면 해병대로 갈거야!” 라는 말을 들어서 시력이 많이 나빠도 현역 입영에 대해 별 의심이 없었다. 그러나, 몇 번의 암실에서 추가 시력검사를 한 후, 신검 군의관이 나한테만 들릴 정도로 나직이 던진 한마디, “고대네?” 그리고 이어진 몇 마디 정감어린 대화 후에 나온 검사결과...

그렇게 92년 겨울에 나는 전혀 의도하기 않게 아무런 불법부당한 노력도 없이 그것이 내 인생에서 독이 될지 약이 될지도 모른 채 5급 제2국민역으로 군입대 면제를 받았던 것이다.

 

그 시절 실감나지는 않았지만 남자라면 피할 수 없는 “군입대” 라는 두려움의 실체로부터 입학도 하기 전에 벗어던지게 된 나는 정말 자유로운 영혼으로 대학생활 4년을 말 그대로 브레이크 없이 폭주하는 기관차처럼 보냈다. 당연히 글의 주제가 첫사랑이 아니라 대학생활이라면 이 또한 최소한 중편연재소설 정도는 되겠지만 일단 배경설명 정도로 스킵 해야겠다. 

 

그렇게 내리 대학 4년을 알차게(?) 보내고, 증권회사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한 나는 여러모로  미숙한 사회초년생일 수밖에 없었기에 학교가 나를 더 원한다고 나는 아직 준비되지 않았다고 스스로를 설득하여 대학원에 진학했다. 물론 이런 결정은 한 것은 군면제가 가져다준 몇 안되는 이점으로 동기들보다 몇 년 여유가 있다는 유아기적인 생각에 기인한 걸 인정한다.

 

대학원 1년을 마칠 무렵, 잠시 억눌렸던 나의 자유를 향한 의지가 다시 꿈틀대기 시작했고 졸업하기 전에 부족한 어학능력을 배양해야 한다는 굳은 신념을 주변 사람들에게 관철시켜 때늦은 어학연수를 감행하기에 이르렀다. 우리나라 평범한 소시민 가정의 둘째아들인 나는 당연히 해외연수를 위한 FM 장학금은 기대하기 힘들었다. 그래서 그 당시에 제법 핫한 트랜드라고 할 수 있던 Working Holiday라는 제도를 이용해서 최소한의 여비와 배낭을 꾸려 지상 최후의 낙원이라는 뉴질랜드로 떠나게 된 것이다.

 

외국어, 영어구사능력 배양이 주목적인 해외여행 아니 연수이기에 한 지역 어학원에서 하루에 몇시간 수업을 듣고 비영어권 사람들과 생활하는 것은 나로서는 매우 비효율적이라고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과감하게 학원을 뛰쳐나와 Backpacking을 하면서 리얼 잉글리시(?)를 쓰는 유러피언 친구들과 어울리며 살아있는 어학연수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러나, 오지 아니 이역만리 뉴질랜드에서의 생활은 그 나름의 외로움을 밑바닥에 깔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그랬던 걸일까? 나는 연수 떠나오기 전에 마지막 미팅에서 만난 그녀의 사슴같은 눈망울을 몇 개월 동안 잊지 못하고 생생하게 추억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나는 요즈음에는 그렇게도 흔해서 공해처럼 여겨지는 메신저도 SNS도 없던 그 시절에 비행기로 직항도 없이 12시간이나 걸리는 지구 반대편 남반구와 대한민국 서울시까지 장거리 연애를 시작했던 것이다.

 

뉴질랜드에 도착한지 얼마되지 않았을 때부터 나는 장문의 편지와 수신자부담전화로 그녀와의 소통의 끈을 놓지 않으면서 언젠가 그녀와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고 막연히 기대하고 있었던 것 같다.

 

나는 뉴질랜드의 아름다운 자연과 풍광을 편지지에 주옥같은 미사여구로 옮겨서 그녀를 그리워하는 내 마음과 함께 녹여서 보내고 또 보내고 보냈다. 답장이 오기도 전에 또 편지를 쓰고 그리움의 단어들이 전달되기도 전에 거부할 수 없는 수신자부담전화로 한국시간으로 늦은 저녁에 그녀의 하숙집 전화벨을 울렸다. 나중에 들어보니 그 당시 그녀의 과외 아르바이트 수입의 상당부분이 전화요금으로 지출되었다고 한다.

 

오클랜드 미션비치의 이국적인 에머랄드 빛 바다와 보석보다 영롱하게 빛나는 해변의 별빛, 영화 “피아노” 촬영지인 피아 해변의 검은모래, 사막같이 펼쳐진 나인틴마일스 비치, 뉴질랜드 북섬의 끝 케이프 레잉아에서 바라본 남태평양 바다 그리고 마운틴 웰링턴 정상의 분화구에 화산암으로 쓴 그녀의 이름 이니셜 등 

요즘같은 디지털 카메라나 고화질 핸드폰 이미지가 아닌 감성의 필름카메라로 찍은 뉴질랜드의 아름다운 자연과 그걸 매혹적인 아니 유혹적인 필체로 묘사한 나의 연애편지는 그녀의 마음이 밤하늘을 날아 뉴질랜드에 있는 나의 곁으로 올 수밖에 없게 만들었으리라!

 

결국 그녀는 대학교 4학년 때, 영어를 그렇게 잘함에도 불구하고 “아임 스틸 헝그리 포 잉글리시!”라고 외치며, 그 당시에는 우리나라에서 그다지 인정받지도 못하던 비정통 브리티시 잉글리시를 배우러 뉴질랜드로 어학연수를 오고야 말았던 것이다!!

 

이역만리 뉴질랜드 오클랜드 공항에서 6개월 만에 다시 그녀를 보았을 때, 그 느낌은 종로2가 한 카페에서 미팅으로 처음 만났던 그 순간보다 더 숨이 멈출 것 같았고 마치 시간이 그대로 멈춘 것 같았다. 

그리고 아직 배낭여행 아니 해외여행도 일반적이지 않았던 그 당시에  우리는 서로의 인생에서 단 둘만이 시간이 멈춘 것처럼 그렇게 그 순간들을 즐겼다.

 

우리는 그녀가 어학연수를 하기에 적합한 도시와 어학원을 찾기 위한 순수한 목적으로 뉴질랜드 북섬의 오클랜드에서부터 로토루아, 타우포, 웰링턴 등 북섬 전체를 다 돌아보고, 남섬으로 내려와 넬슨, 그레이머스, 퀸즈타운, 인버카길, 더니든 등 뉴질랜드 전역을 두루 살펴본 끝에 마침내 남섬의 중간 정도에 위치한 크라이스트처치라는 도시에서 맘에 쏙 드는 어학원을 찾았다.

 

그러는 동안 우리는 무엇보다 배움의 길은 특히 언어를 익히는 것은 역시 부단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고금의 진리를 깨달을 수 있었고, 부수적으로 마지막 지상 낙원과 같은 아름다운 뉴질랜드의 자연을 온몸으로 느끼며 여행할 수 있었다.

 

마우이의 지역 로토루아의 노천온천에서 바라본 별빛 가득한 밤, 헤이스팅스 인근 케이프 키드네퍼스의 세계적인 가넷(가마우지) 군락지, 와나카 호수의 그림같은 전경, 마운트 쿡의 피오르드 해안절경, 폭스 글래시어의 빙하 트래킹 등 모래사막을 제외한 모든 지구상의 자연환경이 존재하는 뉴질랜드 구석구석을 다니면서 첫사랑 그녀와 나는 지금은 아련해졌지만 우리의 마음과 몸이 세포 하나하나가 DNA로 기억할 만한 잊을 수 없는 추억들을 만들었고 그렇게 찰나의 순간 같은 6개월을 함께 보냈다.

 

정말 유익했던 1년간의 어학연수(입사지원서 등 공식서류에는 이 기간은 정확하게 이렇게 표현된다)를 마치고 복학하고 정경대 어학영상실에서 행정조교를 하면서 대학원을 마치고 나서야 나는 조금은 준비된 사회초년생으로 당당하게 다시 직장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 회사에 입사한지 벌써 20년이 훌쩍 넘었다. 하긴 민족 고대에 입학한지도 30년이 되었으니... 

그렇게 함께 말그대로 꿈만같던 시간들을 함께 했던 그녀는...

지금도 당연히 내 옆에서 함께 하고 있다. 

여행과 함께 한 우리이고 여행을 통해 사랑을 키운 우리이기 때문인지 20년을 넘게 살면서 때로 힘들고 어려울 때 우리는 항상 여행을 떠나왔다. 원래 결혼 20주년으로 뉴질랜드를 다시 가기로 했던 우리 계획은 코로나로 인해 실현되지 못했지만 이제 하늘길이 다시 열리면 어디론가 또 떠나갈 계획을 세우면서 새로운 추억을 만들 예정이다.

 

좋아하는 가수 싸이의 노래 가사 중에 이런 부분이 있다.

여기가 바로 지상낙원 

비와 바람도 세상과 사람도 

우릴 막지 말라 우린 이제 달라 

나 홀로 애태웠던 예전과는 달라 

우린 이제 많이 달라

 

요즘도 가족 여행을 떠나는 차안에서 나는 싸이의 낙원을 들으면서 그 시절을 생각하면서 내 옆 좌석에 앉아있는 그녀의 손을 잡고는 한다.


경상대학 경제학과 손치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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