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십니까!(어이~) 민족고대!(어이~) 청년사대!(어이~) 해방역교!(어이~) 잘 나가는 92학번!(어이~) 오!(어이~) 흥!(어이~) 녕!(어이~) 당차게 인사~드립니다!!!”
고향 부산에서는 한 번도 볼 수 없었던 엄청난 양의 눈이 쌓여있는 모습을 보며 떨리는 마음으로 대입학력고사 시험장인 (지금은 우당교양관으로 바뀐) 교양관으로 들어갔던 1991년 12월 16일 이후 얼마나 많이 외쳤던지 ‘FM 인사말’은 30년이 지난 지금도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입가를 맴돈다.
“고려대학교~ 막걸리대학교~ 아, 고려대학교 막걸리대학교~”로 상징되는 <막걸리찬가>가 그냥 만들어진 게 아니라는 건 이미 입학 전부터 소위 「신입생맞이준비추진위원회(약칭 신준추위)」 선배들이 한편으로는 부드럽게, 한편으로는 집요하게 ‘선배들과의 자리에 잘 나와야 나중에 학교생활하기 편해진다’고 할 때부터 알아봤다.
“입실렌티 체이홉 카시코시 코시고 칼마시케시케시 고려대학 칼마시케시케시 고려대학”이라는 교호는 매일 계속되는 술자리가 끝날 때 마다 지겹도록 계속 외쳐서 세뇌되었는지 여전히 쉽게 떠오르지만 세월의 연륜이 쌓이다 보니 그 문구 하나하나가 그냥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역사와 나라를 치열하게 고민했던 선배들의 땀방울이 스며진 작품임을 알게 됐다.
중앙도서관 동쪽 지역을 차지하고 있던 법·경·사 지역(법대, 경영대, 사범대가 있는 곳이라는 뜻임)의 굶주린 청년들의 배를 채웠던 경영관 학생식당의 밥값이 고급밥(?) 1200원, 저급밥(?) 800원이었던 시절이라 만원짜리 한 장을 흔들며 나타난 선배는 그래도 일곱, 여덟 명의 신입생 후배들을 끌고 가서 마치 호텔 뷔페를 제공하는 듯한 의기양양한 표정을 보였었다.
날짜마저 잊혀지지 않는 그해 3월 24일.
정확한 명칭은 기억나지 않지만 갑자기 학생회관 건너 제기시장 쪽에 말로만 듣던 페퍼포그 전경차와 전경들이 쫙 늘어서고, 수건으로 코와 입을 가린 선배들이 학생회관 앞쪽의 울타리 펜스를 뜯어서 담벼락에 걸치더니 학생회관에서 가져온 화염병이 눈앞에서 전경들 쪽으로 날아가고 거기에 반응하여 페퍼포크 전경차에서는 최루탄이 불을 뿜고 전경들은 달려오고... ‘와, 어른들이 대학 가면 데모하는 선배들과 같이 어울리지 말라고 하더니 우리 선배들이 그런 사람들이었나?’궁금하면서도 무서웠고, 최루탄의 매운 연기는 얼굴 전체를 눈물, 콧물 범벅으로 만들었다.
고대생이라면 누구나 거쳐야할 사발식을 앞두고 걱정하는 동기들과 달리 술이라면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기에 ‘그냥 하면 되겠지~’라고 생각했다가 역시 사람은 감정의 동물이자 긴장을 벗어나지 못하는 나약한 존재인데다 사발은 왜 그리도 크고 깊었던지... 그리고 시작 전부터 몇몇 더러운(?) 선배들은 피같은 막걸리에 왜 과자를 넣고 양말을 빨아서 술맛을 떨어지게 하던지. 마시다가 잠깐 멈추니 옆에서
도와주던 선배가 ‘야, 쉬면 토해서 못해. 계속 마셔!’라고 소리치는 바람에 끝까지 마시고 나니 목까지 완전히 찬 느낌... 토하기까지는 불과 몇 초 걸리지 않았다.
대학교는 좀 다를 줄 알았으나 웬걸~ 여기도 선생님 말씀 열심히 따라적고 그대로 외워서 시험답안에 옮기는 걸 해야 점수가 잘 나온다는 걸 알고부터는 ‘쳇, 별거 없네 뭐. 이게 무슨 지성의 전당이야?’싶어 수업이 시시해졌으나 그래도 안 들어가는 것보다는 들어가기는 하되 뒤에 앉아서 보고 싶은 책이나 실컷보자는 생각에 강의실 뒷자리를 전전했다.
“민족의 힘으로 민족의 꿈을 가꾸어온 민족의 보람찬 대학이 있어 너 항상 여기에 자유의 불을 밝히고 정의의 길을 달리고 진리의 샘을 지키느니 지축을 박차고 포효하거라 너 불타는 야망 젊은 의욕의 상징아 우주를 향한 너의 부르짖음이 민족의 소리 되어 메아리치는 곳에 너의 기개 너의 지조 너의 예지는 조국의 영원한 고동이 되리라”
조지훈 선생이 지었다는 호상 비문을 외우는 선배를 보고 왠지 멋있어서 따라했는데, 문구가 어려워서 그랬는지 아니면 내 머리가 나빠서 그랬는지 잘 되는 날은 술술 입에서 나오다가도 헷갈리는 날은 좌로 갔다가 우로 가는 등 난리가 아니었다.
「공강」이라는 이름으로 과의 모든 신입생들을 대상으로 선배들이 진행했던 공부 프로그램에서는 마르크스, 엥겔스, 자본, 자본가, 해방정국, 박정희, 전두환 등의 단어들이 등장했고 ‘아, 이건 아닌 것같아요. 너무 심해요’라는 신입생들과 ‘그건 말이야...’라는 선배들 사이의 격론과 감정싸움이 창과 방패처럼 불을 뿜곤 했다.
“역사의 부름 앞에 부끄러운 자되어 조국을 등질 수 없어 나로부터 가노라”로 시작하는 고대 역교 92학번가를 부르며 “야, 우리 과 형과 누나들 너무 빨갛지 않냐? 자기네들 말이 다 맞는 거라 하고 말이야. 우리도 마음대로 해볼까?”라며 동기들과 역적모의도 하고, 그래서 어느 날엔가 91학번 형들이 92학번 남자후배들을 집합 걸길래 대판 싸우기 직전까지도 갔었지.
5월 28일부터 30일까지 서울 한양대에서 열린 ‘제6기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약칭 전대협) 출범식’에 가려고 하니 과 안에서 NL이라고 하는 분들과 PD라고 하는 분들이 서로 친한 후배들을 데려가기 위해 애쓰는 모습을 보며 ‘이건 또 뭔가?’싶었는데, 그래도 전국에서 올라온 수만 명(당시 언론에서는 8만명의 참가자들이라고 했었음)과 2박 3일을 함께하니 뿌듯하고 재미있고 그랬었다.
자, 이제 술도 그럭저럭 먹었고 놀기도 놀았고 공부는 안 했지만 그래도 학생은 학생이기에 기말고사는 제대로 쳐야겠다 싶어 뒤늦게 수습에 나서보지만 그게 어디 생각처럼 쉽게 되겠나. 밀린 교양영어 공부를 시작해보니 끝날 것같지가 않고, 그렇다고 고등학생 시절처럼 만만해보이는 과목이 있는 것도 아니니 동기녀석들은 집에 가지 말고 학교에서 다같이 모여 공부하자고 분위기는 띄웠으나 밤 아홉 시를 넘기면 출출하고 한잔이 땡기니 없는 돈을 긁어모아 소주, 떡볶이, 순대 등을 사오면 이내 토론장이 펼쳐지고 그러다가 피곤해서 한명씩 학회실 바닥에 드러 누워자면 그래도 불쌍하다고 생각해서 남은 전사들(?)이 자는 녀석들에게 신문지 한 장씩은 덮어줬다. 문제는 다음날 아침이 되면 엉클어진 머리카락과 퉁퉁부은 눈과 공부 안하고 딴짓했다는 자책감에 기분이 더럽지만 그래도 학생이라 시험을 보긴 봤지.
이 놈의 학교는 뭐가 이렇게 바쁜지 기말고사 끝나니 또 농활가야한다고 해서 6월말부터 7월 십 몇일까지 갔던 곳이 강원도 횡성군 안흥면 소사리’였다. 이것만 가지고는 어딘지 모르는 사람이 대부분일텐데, 쉽게 말해 파스퇴르 공장과 민족사관고등학교가 있던 바로 그 마을이었다.
기존 유가공업체를 뛰어넘기 위해 수시로 <조선일보> 1면 하단에 ‘고름우유로 상징되는 다른 회사의 우유와 급속냉동살균하는 자사의 우유를 비교광고하던 파스퇴르유업’옆의 마을이라 그런지 주민 상당수가 파스퇴르 공장에 일을 나가고 있었고, 직원들에게는 아주 저렴한 가격으로 준다고 해서인지 집집마다 냉장고에 그 비싼 파스퇴르 우유와 요구르트가 가득해서 새참과 간식으로 행복하게 먹었다.
그냥 땅을 파서 만든 푸세식 화장실과 몇 십명이 숙소로 사용했던 폐가, 한 톨의 쌀과 한 뿌리의 김치도 버려서는 안 된다는 선배들의 무서운 분위기 때문에 터질 듯이 배가 불러도 꾸역꾸역 남은 밥과 반찬을 먹어댔던 우리 남자 동기들. 그들을 불쌍하게 바라보던 여자 동기들.
새파랗게 젊은 대학생 애들이 농사 도와준다고 온 게 기특해서인지 주현이 형님을 비롯한 동네 형님들은 밤마다 댓병 소주들을 잔뜩 준비해서 우리를 기다렸고, 그 마을은 작은 소주잔은 도통 보이질 않고 매번 맥주잔 가득 따라 마셨으니 다음날 아침이 되어도 술이 깨질 않았다.
2학기는 금방 지나갔다.
시작되는가 싶더니 선배들이 고연전 가야한단다. 첫째날은 잠실야구장, 둘째날은 올림픽주경기장에서 하루 종일 응원하고 저녁마다 술 먹어야 한단다. 금요일인 첫날부터 전체수업이 휴강이라 얼씨구나 좋았지만 아무리 한창 피끓는 스무살 청춘이라 하더라도 이틀 내내 응원하고 밤새도록 술 먹다가 취기 오르면 또 응원하고, 술자리 옮기려고 나왔다가 또 응원하는 건 인간적으로 너무 힘들었다.
10월이 되니 선배들이 학생회 선거를 같이해보자고 했다.‘우리 모두의 공간이자 우리의 의견을 담아야 다음 학생회가 잘 된다’며 과학생회·단과대학생회·총학생회 선거 모두 함께하자고 했다.
고민을 많이 하기보다는 일단 뭐든 참여해서 보고 듣고 느끼는 편이라 이번에도 직접 몸으로 부딪히고 움직이며 생각하고 다시 활동했다. 벌써 날씨가 꽤 추워져서 아침, 저녁으로 몸이 떨릴 정도였지만 다른 이들도 고생하는 걸 보고 불만을 접었다.
우리도 받았던 것처럼 새로 들어오는 93학번 후배들에게 잘해주기 위해 ‘신입생맞이준비추진위원회’가 동기들 사이에서 새로 꾸려졌다. 1학년이 끝나간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그래도 후배가 생긴다는 건 왠지 기분 좋은 일이었다.
3월에 있었던 국회의원 선거에 이어 12월에는 대통령선거가 있다고 하며 선배들이 같이 해보자고 했다. 이번에도 뭔지 모르지만 일단 해봤다. 하지만 무섭더라. 권력을 놓고 겨루는 경기라 그런지 살벌하고 양보라는 것이 없었다. 언론들도 너무 편파적이었다. 좌절했다.
한해의 마지막 달인 12월이 되니 지나온 시간들이 자꾸 생각나더라.
잘 살았나? 열심히는 했고? 점수는 몇 점?
세상사는 ‘이것은 이것이다’라고 단정하기는 참으로 어려운 것같다.
정답이 아예 없는 것같다.
그저 스스로를 다잡고, 나 자신을 위로하고, 내 곁의 사람들에게 힘이 되어줄 수 있으면 잘하는 거다. 해줄만큼 해주고, 못하는 건 못한다고 솔직하게 이야기하며, 안되는 건 아니라고 욕먹을 각오하고 결론 내려야 차라리 속편하다.
우리의 스무 살을 장식했던 1992년의 기억들도 각자의 머리 속에 어떻게든 자리잡고 있을 것이다. 정답은 없다. 그 순간이 지금의 삶에서 자양분이 되고, 그때 겪었던 시행착오가 현재의 발전을 이끌며, 매순간마다 느꼈던 소중함이 남아있다면 그걸로 족하다.
좌충우돌하며 ‘박살나기 위해’ 움직였던 시절이 있기에 지금의 우리가 있다.
앞으로 남은 삶이 얼마나 더 될지 모르겠지만 잘 살아보자.
그래야 ‘고대92’답다.
사범대학 역사교육학과 92학번 오흥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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