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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생활에 로망있는) 컨트리스퇄 도시인의 1년 깡촌 생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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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대92 2022. 10. 20. 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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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어떤 연고도 없는 정읍 칠보면 수곡리, 하루에 버스 2번 다니는 깡촌에 이사한 날은 2012년 2월 26일, 그걸 결정한 날은 2012년 1월 16일이었다. 난 뭔가에 꽂히면 지르는 건 선수다.

 

 

  그날은 방학 중 교사 연수날이었다. 그때는 열정이 넘쳐나던 때라 휴직 중이었지만 2박 3일 교사 연수에 참가하였다. 교사 연수 중에 '농촌교육'이라는 주제 분과가 있었고, 평소에 관심 있었던 주제였다. 지리에서는 도시와는 대비되는 '촌락'이라는 개념으로 농촌 공간에 대한 내용이 있다. 대부분 도시인들의 먹을거리를 충족시켜 주고 도시지역에 비해 훨씬 넓은 공간적 범위를 차지하고 있음에도, 도시에 비해 무언가 열등감을 풍기는 촌락, 어떻게 아이들에게 수업을 해 줘야 할까?하는 고민으로 참석하였다. 

 

  난 농촌에 대한 교육이라고 생각하고 참석하였는데, 어라! 뭔가 분위기가 요상하네~ 강사들은 인도 요기 혹은 히피 포스를 풍기는 중년의 남녀들이었고 수업을 듣고 보니, 그분들은 농촌에서 초등교육의 한 부분을 맡고 있는 산촌유학센터에서 산촌유학을 맡고 계시는 시골분들이셨다. 그분들의 지역에서 농촌유학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고, 인근 초등학교와 어떻게 연관되어 교육을 하고 있는지 말씀하셨다. 

 

  수업을 들으면서, 원래 내가 달성하려 했던 수업 목표는 오래 전에 잊어버리고, 자연속에서 아이들이 맘껏 뛰노는 모습을 보니~~ 와우! 가슴이 뛰면서 ‘저기에 너무 살고 싶다. 헌데 나는 경기도에 매인 몸인데, 어떡하지? 아... 휴직기간 밖에 없구나! 아… 그 그렇다면 바로 지금, 롸잇 나우? 내가 이수업을 듣게 된건… 세상에나, 이건 운명이야!’ 

 

  육아휴직기간이었던 바로 그때! 나는 수업을 들었던 학교 중에 가장 맘에 들었던 전북 정읍의 수곡초등학교로 아이들을 전학시켜야겠다고 생각하고 바로 실행으로 옮겼다. 당시 큰 아이는 초2, 작은아이는 공동육아 중이었고, 나는 육아휴직 중. 어떻게 남편에게 이야기하고 어떻게 집을 봤는지 사실 기억이 잘 나질 않지만, 남편도 나와 비슷한 정서를 가지고 있었고 이 여자는 한번 꽂히면 한다는 걸 알고 있기에 남편 허들을 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집도 생각보다 쉽게 전세로 구해졌다. 남편은 당시 주4일제 근무를 하고 있었고, 우리 집은 광명ktx역이 가까웠고, 남편 회사는 가산디지털단지였다. 남편은 목요일 저녁이나 금요일 아침에 정읍으로 내려와서 월요일 아침 기차를 타고 출근했다. 주말부부였던 셈이지만 온전히 얼굴을 안 보는 날은 약 3일이었다. 

 

  하지만 큰 아이는 허들이었다. 큰 아이를 설득했던 장면은 기억난다. 처음 아이는 엄청 싫어했다. 여러번 설득했던 거 같고 겨울 방학은 점점 끝나가고 있었고, 아이가 거부한다면 시골살이는 하지 말자~ 라고 약간은 포기할 시점에 다행히 큰 아이가 허락! 큰 아이의 마지막 말이 생각난다. 

 

   김승혜: '진짜 솔직히 가고 싶은 맘 몇 프로, 안 가고 싶은 맘 몇 프로야?' 

 

   큰아이: ‘가고 싶은 맘 60프로' 

 

   이얏호, 간다, 간다! 드뎌 허가가 났다!!! 아~ 근데 이놈 봐라.

 

   큰 아이: '헌데 안 가고 싶은 맘은 140%야’ 짜식, 농담은..ㅎㅎ 그래서 우리는 전학을 했다!!!

  2012년 난 그 1년이 참 좋았다. 그립다. 지금 또 하라 그러면? 아이들이 없어서 쓸쓸할 거 같지만, 그때 그 이웃이 다시 있다면, 가고 싶다. 다행히 큰 아이도 좋아했다. 전학을 했었던 때가 초2였었는데 초4 정도 되어서 정읍이 그립다면서 다음지도에서 로드뷰로 정읍을 다시 찾아볼 정도였다. 

 

  사시사철 길가에 핀 꽃 나무순을 보고, 바람을 맡고, 문을 나서자마자 내 온몸으로 맞을 수 있는 자연이 참 좋았다. 구경하는 자연이 아닌 풍덩 들어가는 자연의 느낌이었다. 우리가 세 들어 살았던 집은 집주인이 직접 손으로 지은 음식점용 황토온돌집으로 단체 손님도 받고 했었던 것 같지만, 우리가 세들 당시는 전혀 영업을 하지 않았었다. 이중창이 아니었고 창은 컸고 천장은 높았으니, 단열은 당연 안 좋았다. 그래서 10월 정도부터 난방을 시작했다. 화목보일러였는데 가정용 집이 아니니 보일러가 있는 곳은 집 바깥을 돌아나가 있었다. 오후 4~5시 정도가 되어 아이들이 집에 오면 저녁 준비를 하면서 보일러에 나무를 넣고 토치로 나무에 불을 붙여 보일러를 땠다. 구들이 뜨끈뜨끈했다. 한겨울에도 반팔로 있을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새벽 5시 정도면 나무가 다 타서 방이 차가워지고 저절로 눈이 떠졌다. 옷을 둘러 입고 문밖을 나가 나무를 넣고 토치로 불을 붙여 보일러를 지핀다. 입김 서린 새벽 하늘에 별이 총총. 그 생활이 단지 인생의 이벤트였음을 알았기 때문이겠지? ‘내가 언제 이런 경험해 보겠노’ 싶어 그 새벽도 행복했다. 

 

  봄에는 뒷산에 올라 산딸기도 따 먹고, 산 속에서 아이들과 크게 노래를 불렀다. 동물들에게는 소음이었겠지만 산 속에 낭낭히 울려퍼지는 아이들의 노랫소리가 얼마나 맑던지… 여름에는 바로 집 앞에 있는 저수지에서 아이들과 물속에서 놀았다. 가을에는 인근 축제를 많이 다녔고, 눈이 자주 온 겨울에는 바로 집 앞에서 끝내주는 눈썰매를 탔다, 이글루도 만들고. 

 

  우리집이 골짜기 안쪽에 있었기에 걸어서 20분 정도 되는 학교까지의 길은 계속 내리막길이었는데, 겨울에 작은 아이는 플라스틱 눈썰매에 누워서 하늘을 보며 등원을 했다, 나는 뒤에서 썰매 내려가라고 툭툭 치면서. 가끔 아침에 늦게 되는 경우 그 집 근처에 사는 아이들과 우리집 아이들을 차에 태워 내려갔다. 귀동냥으로 ‘미끄러운 길에서는 절대! 브레이크를 밟으면 안 된다’는 얘기를 듣고, 내리막 얼음길에 차가 주욱 밀려갈 때 너무 놀라 비명을 지르면서 브레이크를 밟지 않고! 이리저리 핸들을 미친 듯이 돌렸었다. 지금 다시 생각해봐도 ‘식은땀이 나네~’ 궁리 끝에 그 긴 내리막길을 어떻게 내려갈까 하다가, 처음에 엑셀을 밟아 속력을 좀 내면 나중에 그 속도가 감당이 안 되고 커브길에 위험하다 싶어, 아예 처음부터 브레이크에서 발을 떼고 한 번도 브레이크를 밟지 않고 내려갔었다. 헐… 근데 나중에 또! 귀동냥을 하니, 그런 경우는 저단 기어를 놓고 가면 된다나!!! 이런~ 쌩초보가 있나! 내 운전면허는 정읍 오기 전 3개월 전에 땄었거든. 

 

 정읍에 있으면서 집을 꼭짓점 삼아 주말이면 전남 전북 경남까지 두루 다녔다. 이른 봄의 섬진강(김용택 씨 글을 읽고 얼마나 섬진강을 구경하고 싶었던가!)은 너무나 아름다웠고 지리산도 좋았다. 남해도 좋고, 광양, 구례, 변산, 순천, 함평, 고창, 광양, 담양, 보성… 어디 한국에서 아름다운 곳이 한둘이겠는가! 또 한창 귀여운 아이들과 남편과 같이 있어 좋았다. 

 

 

  그럼 내 시골 생활에는 전혀 어려움이 없었단 말인가?

 

  그럴리가!!! 

 

  벌레, 아니 지네가 너무너무 싫었다! 손바닥만한 나방(정말!), 기계음에 가까운 날개 소리를 내며 나는 풍뎅이, 뭐 이런 건 참을 수 있다. 움찔 놀라기도 하고 비명도 살짝 지르긴 하지만 나를 물지는 않잖아! 지네한테 물려봤는지? 엄청 아프다. 순식간에 벌 2~3마리한테 쏘인 느낌이다. 아프기만 한가? 세상에~ 지네! 이건 정말 너무 너무 너무 징그럽다! 난 처음 봤다. 살아있는 지네를… 제기시장에서 말려 있는 지네를 보긴 했지만, 살아 빠르게 움직이는 지네란!!! 와우~ 엄청 큰 성충의 지네는 펼치면 20센티는 족히 넘을 테고, 파도가 넘실대는 듯한 찌인한 다홍색(무당개구리 배색깔)의 수많은 다리, 빤질빤질한 암갈색 몸통은 곤충이 아닌 갑각류의 껍질을 연상시킬 정도다. 게다가 이놈은 물기까지 한다. 우리 집안에서는 여자들만 물렸고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남았다! 독한 여자들.

 

  우리 집 화장실에서 족히 20~30센티는 되어 보이는 넘실되는 찐다홍색 수많은 다리의 빤질빤질한 지네를 본 날은 절대! 잊을 수 없다. 그 놈을 보는 순간 난 제 정신이 아닌 것처럼 소리를 질러대면서 슬리퍼로 ‘어떤 일이 있어도 이놈을 죽이고 말겠다’는 일념으로 놈의 몸을 무지막지하게 내리쳤다. 칠때마다 '으악, 으악' 소리를 내면서 있는 힘을 다 했지만, 그 놈은 잘 죽지도 않고 엄청 빠르게 움직였다. 큰 아이 이름도 동시에 부르면서 ‘빨리 엄청 큰 돌을 가지고 오라’고 난리 난리 다 쳤다. 결국엔 그 놈은 죽어, 큰 아이가 두 손으로 낑낑대며 들고 온 작은 바위 밑에 깔렸고, 살았는지 죽었는지 도저히 확인할 엄두는 나지 않아, 남편이 올 때까지 고스란히 화장실에 있었다. 불쌍한 남자들…

 

  한번은 작은 아이가 밤에 자면서 소리를 지르면서 ‘엄마, 볼이 너무 아파’하길래, 잠에 취한 나는 작은 아이를 안으면서 ‘어…. 그래그래, 괜찮아’하면서 재웠는데 자고 일어나니 볼에 2개의 작은 점이 있었다. 지네한테 물린 거였다. 나도 자면서 등에서 뭐가 엄청 따끔! 하길래 순간적으로 지네라는 것을 알았고, 정말 90도로 벌떡 일어나 ‘지네!’ 하고 소리를 지르며 난리 난리치니 새끼 지네가 빠르게 어디론가 도망쳤다. 다행히 그날은 남편이 있어서 얼마나 든든하던지… 시골 단독주택은 아주 습하다. 지네는 습한 걸 싫어해서 이불 속이나 신발 속 이런 뽀송뽀송한 곳에 들어가서 몸을 정갈히 말리는 걸 좋아한단다. 포근포근한 이불 속이나 신발에서 언제 지네의 습격을 받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드니 저절로 몸서리가 쳐졌다. 그래서 집안에 텐트를 치고 살았다. 난방도 되고, 지네도 막고, 은근 아늑하고, 이불 안 개도 되고... 1석 몇조야?

 

 

  내가 시골에 살아보니 나의 시골에 대한 로망은, 엄청 건방지게, 목가적 풍경에 대한 로망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노동은? 싫다. 그래서 시골 생활에 대한 내 생각이 건방진 걸 알았다. 그래서였는지 작은 텃밭이 있긴 했으나 잡초가 무성했고, 관련 일은 주말에 내려오는 남편 몫이었다. 정말 텃밭이 코딱지만 했으니 다행이지… 부산 영도 출신의 촌년이긴 했지만 중3 때 온가족 서울 상경으로 도시가 아닌 곳에서 생활해본 적은 없었고, 그러니 도시가 주는 달달한 쇼핑의 유혹은 내 몸 깊이 뿌리박혀 있었다. 그래서 도시의 내음이 맡고 싶을 때는 차로 전주를 갔다. 40~50분 거리였다. 1년 살이가 끝나갈 초겨울쯤에는 전주의 무형문화재가 하는 전통자수 수업을 핑계로 일주일에 한 번 전주에 갔다. 지금 생각해보니 도시의 뽕이 그리울 때가 슬슬 나에게 다가왔었나 보다. 

 

  다시 복직을 하면서 1년간의 정읍 생활을 접고 서울로 오면서 정말 섭섭했던 것은 내가 정말 좋아했던 목가적! 풍경도 있지만… 우연히 알게 된 정말 내 인생의 보석같은! 사람들이었다. 우리 이웃 중에 전국의 괜찮은 초등학교 리스트를 만들고 그 학교들을 직접 답사를 하고 온 가족의 찬성으로 정읍의 우리가 다녔던 학교로 입학한 가족이 있었는데, 그 가족들이 그 보석이었다. 향임언니, 기자언니. 게다가 내가 2013년 복직했었던 학교는 교장이 너무나 상식이하로 악명 높았던 학교여서, 그 언니들에게 얼마나 자주 전화를 했던지. 지금도 가끔씩 그리운 내 인생의 보석들이다. 

 

 

  오십살, 작은 아이가 반백살이라고 자주 놀린다. 이제 반 남은 내 인생은 내가 하고 싶은 거 하고 싶다는 욕망이 솟구친다. 작지만 기존에 내가 가지고 있는 걸 놓자니 아깝다는 생각을 버릴 순 없지만, 조금 덜 소비하고 산다면 불가능해 보이지도 않는다. 전국에 아니, 세계에 나의 보석 같은 친구들, 보물 같은 장소를 만들고 싶다.


사범대학 지리교육과 김승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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