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ay

1992년 한여름 밤의 꿈!

고대92 2022. 10. 15. 06:10

내가 1991년 고등학교 3학년 때 제1회 대아고 축제에서 각설이타령으로 은상을 받으면서 얻은 것과 잃은 것이 있었다. 우선 얻은 것은 내가 연극을 통해 연기가 된다는 것과 이쪽 분야에 가고 싶다는 꿈이 생긴 것이었고, 잃은 것은 성적이었다.ㅠㅠ

 

그 이후 나는 예능쪽을 생각하며 신문방송학과를 가고자 했으나 시골 면사무소에서 근무하시는 아버지의 영향으로 그 학과 대신 영어교육과를 가게 된 나는 대학생활이 재미있을 리가 없었다. 그냥 선후배들과 술 마시는 것이 좋았고, 그 해에 대통령선거가 있고, 나라가 어수선할 때이기에 집회에 참석하고 선배들의 무용담을 안주 삼아 시대를 논하는 것이 전부였으니까...

우리 과는 사회과학연구반, 영어교육연구반, 학과문집‘종이거울’을 제작하는 편집국 등의 학술소모임와 stubborn(농구), natural(야구), 풍물패와 연극반, 신바람(노래소모임) 등 다양한 소모임에 우리 동기들이 주축이 되어 활발하게 활동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 중 사회과학반에 들어가 한국사회의 모순과 어두운 현실을 알게 되었고 또 온몸으로 바꿔보려고 발버둥을 쳤었고 풍물패에서는 우리 학기를 배우고 함께 흥을 즐기는 방법도 느꼈다. 하지만 내가 가장 하고 싶었던 것이 연극이었기에 처음에는 극예술연구회에 들어갈까 고민하다가 학과에서 학번대표를 맡고 있기에 학과 연극반에 들어가게 되었다. 우리 동기들 중 정말 다양한 이유로 연극반에 들어왔었다. 자신의 소극적인 성격을 극복하고 싶어하는 친구, 연극이라는 인생 속에서 주인공이 되고 싶은 친구, 그냥 친한 친구가 가입하자고 해서 따라온 친구 등등..... 그 계기야 무엇이든지간에 연극을 하고자 하는 열망은 분명했으니까.

 

1991년 9회 공연까지는 학과의 특성에 맞게 영어연극을 해왔었지만, 대중성과 관객들과의 호흡, 재미 등의 이유로 작품은 영미 희곡으로 정하되 우리말로 공연하기로 결정하고 Shakespeare의 “A Midsummer Night’s Dream”을 선택하게 되었다.

 

먼저 연기를 하기에 앞서 올바른 발성법 및 호흡 조절법, 소리의 높낮이와 원근감, 동작의 자연스러움과 유연함 등 연기를 하기 위한 작은 것부터 하나하나 배워갔다. 심지어 얼굴로 표현할 수 있는 오감(五感)까지도 배웠으니 지금 생각하면 가르치는 연출형과 선배들 뿐만 아니라 배우려고 기를 쓰던 우리들도 참 대단했던 것 같다.

작품이 정해지고 배역을 정하는 과정에서 예기치 않았던 문제가 발생했다. 이 작품 속에 나오는 등장인물이 30명 이상이 되는데 정작 연기할 수 있는 배우는 14명 정도밖에 되지 않아 시나리오를 재편하고 인원을 줄여도 1인 2역을 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글 전체의 흐름을 이끌어 가는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보텀’이라는 역은 연극에 대해 제대로 배우지 못한 1학년인 내가 맡게 되었다. 그 배경에는 이런저런 구설수가 있었지만 가장 정확한 이유는 내가 두 배역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에 대한 확실한 증거는 바로 ‘사투리’였다. 경남 진주에서 20년을 살면서 사용한 경상도 사투리를 하루 아침에 서울 말로 바꾸는 것은 나에게 가장 힘든 연기였다. 연출을 맡은 88학번 형은 1대1 특강을 실시했고, 그것도 모자라 연극반의 대부이신 82학번 선배까지 오셔서 지도했지만 그런 특강도 무색하게 만든 나의 사투리 실력에 두 분은 두손두발 다 들 수 밖에 없었다. 긴급회의를 한 끝에 나는 1인 2역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그것도 Shakespeare 작품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는 첫 주인공이 된 것이었다. 지금이야 드라마나 영화 등 대중매체에서 다양한 사투리가 나오기에 거부감이 많이 없고 오히려 사실적인 요소로 받아들여지지만, 그 당시에는 정말 파격 그 자체였다. 더군다나 연극 지도교수님이 자신의 전공인 Shakespeare 작품을 사투리로 연기한다는 것에 상당한 불쾌감을 보여셨기에 연출하는 형이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했을까는 미루어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배역이 정해지고 대본리딩을 하면서 지쳐가는 우리들은 우이동은 1박 2일 MT를 떠났다. 그곳에서는 연극에서 벗어나 즐겁게 게임도 하고 술도 마시고 노래도 부르면서 그동안 받은 스트레스를 풀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는 얼마 되지 않아 무너지게 되었다. 모든 말들을 연극 톤으로 내뱉어야 했고 움직임 하나하나를 연극 동작으로 했고, 그 재미있는 게임들도 진지한 자세로 임해야 했으니 놀러간 것인지 연습의 일부인지 혼돈이 올 수 밖에 없었다. 그래도 술과 노래와 좋은 사람이 있기에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시간인 것은 분명했다.

여름방학이 시작되면서 우리들은 아침 8시부터 밤 늦도록 본격적인 연습을 진행했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단지 대사만 내뱉는 것이 아니라 무대 위에서의 자연스러운 동작이 나올 수 있도록 체력을 길러야 했기에 운동장을 돌고 윗몸일으키기나 푸셥 등 전혀 연극과 관계없어 보이는 운동도 함께 병행했었다.

 

 “A Midsummer Night’s Dream”의 전체 줄거리는 현실 세계 귀족 가문의 결혼식을 둘러싼 아픔과 숲속에 살고 있는 요정 세계가 뒤섞이면서 벌어지는 헤프닝이 절묘하게 어울어진 낭만적이고 몽환적인 세계가 펼쳐지는 것이다. 그 중 나는 귀족의 결혼식에서 마을 사람들과 축하 공연을 하게 되는 배역이었다. 대한민국의 현실에 맞게 때밀이, 가게 주인아저씨 등 다양한 소시민이 나오는데 나는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자짱면 배달부로 나오니 그리 나쁜 설정을 아니었다. 다만 지도교수님은 끝까지 싫어하셨지만...

마을 사람들이 어떻게 공연을 준비할지를 의논하기 위해 모이는 장면에서 새로운 시도를 해보자는 의견이 나왔다. 보통 연극에서 무대 옆에서 등장하여 반대쪽 무대로 퇴장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나의 등장신은 가게 주인아저씨가 나를 부를 때 철가방을 들고 객석 제일 뒤에서 스키이트보드를 타고 무대에 올라가는 것이었다. 나는 이 한 장면을 위해 한달 동안 스키이트보드타는 연습을 했고 내 무릎과 팔꿈치를 아스팔트에 헌납했다.

 

한 달 이상의 연습을 마치고 3일간 4회 공연의 대장정에 돌입했다. 나는 원래 성대가 강하지 못해 늘 목에서 쇳소리가 났고, 가끔씩 집회에 나가 목소리를 높이다 보니 목소리가 제대로 나올 리가 없었다. 그 당시에 목캔*나 홀*같은 것을 달고 살았었다. 하루 공연을 마치고 나면 목소리가 거의 나오지 않을 정도였기에 약을 먹어가면서 성대를 달랬었다. 문제는 마지막날 2회 공연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첫 번째 공연은 무리없이 진행을 했지만 두 번째 공연에서는 목소리가 거의 나오지 않는 상황까지 이르렀다. 이 공연은 내가 동작을 어떻게 하느냐, 대사 전달이 얼마나 잘 되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목소리가 나오느냐에 달려있었다. 폭포수 아래에서 피를 토하며 득음을 하는 소리꾼의 심정이 이런 것은 아니었을까 싶었다.

 

천신만고 끝에 연극을 마치고 나서 뒷풀이에서 말 대신 눈물로 모든 감정을 쏟아냈고, 3일 정도는 강제 묵언수행을 할 수 밖에 없었다.

2학년 때는 무대감독으로 연극반에서 내 역할을 수행했고, 3학년 때는 과 학생회장으로서 연극에 초대하는 글을 쓰면서 그 인연을 계속 이어갔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에게 있어 1992년은 그 연극의 제목처럼 ‘한여름 밤의 꿈’을 멋지게 꾼 시골 촌놈의 별빛 찬란한 백일몽이지 않을까 싶다.


사범대학 영어교육과 이영조